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시이 마모루 (문단 편집) == 경력 == [[1951년]] [[8월 8일]] 생. [[도쿄도]] [[오타(동음이의어)#s-1.2|오타]] 구 출신. 어릴 때부터 영화 감독을 꿈꾸어서 이미 어린 나이에 카메라를 샀을 정도였다. 1970년 [[도쿄학예대학]]에 입학해 영화예술연구회라는 동호회를 만들고 16mm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 특히 SF영화들에 심취하여 당대의 특촬물들을 전부 섭렵하기도 했다. 엄청난 영화광으로 일이 없을 때는 일주일에 영화를 10편 정도를 본다고 하며, TV 편성표나 극장 스케줄을 알아내서 시간표를 만들어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제일 영화를 많이 볼 때는 하루에 3편 정도를 봐서 1년에 1,000편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데 너무 심취해서 학교를 나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https://youtu.be/9tNSgpNtG2E|#]][* 오시이 마모루 이후 일본 만화에서 씨네필들은 이처럼 많은 양의 감상을 하며 폐인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하라 히데노리]]의 [[겨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수생 일본예대 지망생.]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SF]]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일본 영화의 현실상[* 오시이가 사회에 진출할 무렵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 영화계는 최대 불황이었으며, [[로망 포르노]]라는 독특한 영화 제작 시스템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현재도 일본에선 영화가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비해 비중이 작다. 특히 일본에서 박스오피스 흥행작만 해도 대부분이 애니메이션 아니면 TV드라마에서 흥행했던 작품의 극장판이다.] 그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졸업시엔 영화계에 갈 생각도 없어 소학교 미술선생으로 내정[* 학생시절 과외학원 강사를 했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나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되어 있었으나 친구가 원서를 분실하는 바람에 낙방했고, 영화회사들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여의치 않자 한동안 백수 생활을 해야했다. 게다가 겨우 지방 방송국에서 라디오 PD자릴 얻었지만 말이 좋아서 PD이지 사실상 잡역인데다 월급도 너무 적어 반년 만에 때려치고는 [[히키코모리]]까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전신주에 붙어있던 [[타츠노코 프로덕션]] 모집공고를 보고는 입사원서를 냈다. 이 때문에 동시대에 활약한 다른 감독, 애니메이터들에 비해서 나이가 10년은 차이난다. 오시이가 [[안노 히데아키]] 같은 1세대 오타쿠 세대랑 같이 활동해서 같은 세대로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오시이는 2021년 기점으로 나이 70이 된 사람이다. 오히려 10살 연상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친구 먹고 지낼 정도다.[* 참고로 의외로 한국에서 젊은 걸로 알거나 [[신카이 마코토]]와 동세대의 감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호소다 마모루]]도 나이가 꽤 된다. 왜냐면 늦게 떠서.] 동료인 타츠노코 4천왕 중 3명은 모두 오시이보다 선배인데 오시이가 제일 나이가 많다. 그렇지만 2021년 인터뷰에서는 당장 은퇴 의사는 없고 앞으로 10년은 감독을 더 할 것이라고 한다. 한동안 활동을 안 한 것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스폰서가 안 붙어서 못했다고 한다. 타츠노코에서도 처음에는 사무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에 일손이 부족해서 영화 제작 경험이 있는 그를 연출 보조에 투입시켰는데 영화를 많이 본 오시이는 금세 어깨 너머로 연출로 원화맨 출신 연출가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며 이례적으로 연출가로 데뷔했다.[* 같이 연출 데뷔했던 동료들이 모두 입사 2년 선배들이었다고 한다.] 크게 누구에게 배운 것도 없이, 노력도 없이 바로 떠버린 천재 타입 크리에이터이기에 본인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나마 연출의 기초를 가르쳐준 게 [[사사가와 히로시]].[* 오시이의 코미디 연출은 사사가와 히로시와 많이 유사하다. 그러나 자신의 스승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데 사사가와 히로시는 만화 연출을 지향하고 오시이는 영화 연출을 지향해서 서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와 [[마시모 코이치]]였다. [* 오시이가 입사했을 때 사사가와가 마시모를 불러서 "네가 가르쳐라. 저놈이 잘못되면 네 책임이야." 라고 해서 돌봐줬다고 한다. [[https://zillion-archive-room.hateblo.jp/entry/64813330|#]]] 이때의 오시이는 [[우에다 히데히토]], [[마시모 코이치]], [[니시쿠보 미즈호]]와 함께 '타츠노코 사천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시이는 자신에게 현장 기술과 연출을 가르쳐준 스승은 [[토리우미 히사유키]]라고 단언한다. 둘은 타츠노코 프로덕션 시절에는 서로 엇갈려서 연출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오시이가 타츠노코에서 연출가로 적응했을 때 토리우미는 회사를 나갔다.] [[스튜디오 피에로]]에서 다시 재회하고 [[닐스의 모험]]을 만들며 연출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훗날 세계 최초의 [[OVA]] 작품 [[달로스]]를 공동 감독하기도 했다. 직접 만나서 기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가장 존경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은 [[데자키 오사무]]를 거론한다. 데자키의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을 봤을 때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다.' 라는 충격을 받았으며 그걸 몇 번을 돌려보며 연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내일의 죠/애니메이션|내일의 죠 2 극장판]]은 세계 명작 영화와 비견할 작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오시이가 최고의 영화라고 선정한 작품 중 애니메이션은 내일의 죠 극장판과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단 2개다.] 오시이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때부터 작화 매수를 많이 안 쓰게 되는데 그것도 데자키의 영향이라고 한다. 오시이를 확실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만든 작품은 바로 '[[시끌별 녀석들(1981년 애니메이션)|시끌별 녀석들 (1981)]]'이다. 막 이름 내건 초짜가 시청률 20%의 국민적 시트콤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으니 업계의 주목이 모였다. 또한 극장판 1, 2편으로는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정립해 가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 애니메이션은 중간에 감독이 바뀌었는데 감독이 바뀌자 안 보겠다는 현상이 속출하기도 했다. 지금도 시끌별 녀석들 팬 사이트 중에서는 오시이 마모루 분량만 다루는 사이트가 많이 남아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농담이 아니고 이때의 오시이 마모루는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인기 감독이었으며 네임 밸류만으론 [[토미노 요시유키]]와 [[타카하타 이사오]]와 비볐다. [[https://twitter.com/htGOIW/status/1478529829691871234|#]] [* 사실 미야자키는 좀 늦게 뜬 편에 속한다. [[스즈키 토시오]]가 도와주기 전까진 마케팅을 정말 대충하기로 유명했고 유명세에 비해 흥행이 영 좋지 않았다.] 미야자키와 토미노도 이 작품으로 오시이의 이름을 알고 시끌별 녀석들을 직접 시청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거기다 최초의 [[OVA]]인 달로스를 감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5년에 감독한 애니메이션 [[천사의 알]]이 난해한 내용 덕에 대차게 말아먹었고, 이렇게 말아먹은 덕에 불러주는 사람 없는 백수 신세로 전락한다. 이때 시끌별 녀석들을 꽤 감명깊게 봤으며 그 이전부터 오시이와 친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 프로듀스한 작품 '앵커'의 감독으로 그를 기용했으나 오시이 마모루는 작품관의 차이로 [[타카하타 이사오]]와 대판 싸우고 미야자키는 "너희들 그럴 거면 하지 말라"고 해서 작품은 제작 중단되었다. [[http://ghibli.jpn.org/report/anchor/|#]] 그러나 이때 [[밀덕]]이었던 오시이 마모루와 미야자키는 꽤나 친해졌고 지금도 사적으로 연락하고 서로 기술을 주고받을 정도의 관계로 들어갔다. 흔히 나이 차 때문에 사제 관계로 알려져있으나 오히려 미야자키가 오시이에게 배운다고 할 정도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 젊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는 밀리터리, 철학, 종교에 대해서 지식이 너무 풍부해 업계에서 말을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시이밖에 없어 시끌별 방영 당시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오랜 공백기에 오시이는 [[이토 카즈노리]]의 소개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제작 집단인 헤드 기어에 초빙된다. 오시이 마모루 자신은 패트레이버의 세계관이나 메카닉이 마음에 안 들어서 꽤나 툴툴대긴 했지만, 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단 기획집단 "헤드기어"에 참여,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구 OVA, 첫 극장판과 두 번째 극장판을 감독한다. TV판에서는 몇몇 에피소드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신 OVA에서도 각본으로 참여했다. 오시이 마모루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한 작품은 1995년작 '[[공각기동대]]'로 이 극장판의 성공으로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프로덕션 I.G]]의 작품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랑]]으로 여기서는 기획과 각본을 맡았다. 한편으로는 실사영화 제작에 주력해 [[폴란드]]에서 촬영한 '[[아바론]]'을 만들기도 했다. 2004년 '공각기동대'의 후속편격인 '[[이노센스]]'를 연출했고[* 그는 이 작품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도 못해본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데 성공했다. 서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메이저 감독으로 주목받은 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때 부터이지 그 전에는 서양에서는 그냥 매니아들이나 아는 정도였다.], 2008년에는 '공각기동대'를 지금에 맞게 리뉴얼한 '공각기동대 2.0'과 어드벤처물 [[스카이 크롤러]]를 내놓았다. 2009년엔 아바론 이후 8년 만의 실사 영화 [[어썰트 걸즈]]를 내놓았다. 게임 [[철기]]의 후속작 '중철기'의 예고편을 감독하기도 했다. 급진좌파의 철학적인 사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인랑(애니메이션)]]에서도 [[전공투]]를 연상하게 하는 묘사가 많아서 혹시 전공투가 아닌가 싶었는데 2008년에 자서전에 밝히기를 실제로 고등학교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집에 경찰이 찾아오자 아버지가 기겁해서 학생운동 열풍이 잦아들 때까지 감금을 시켜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자신은 아무것도 못 했다는 무력함에 사로잡혀서 대학생활도 엉망으로 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동 시대의 다른 좌익 출신들이 나이 먹고 사상이 둥글어지거나 보수로 전향하는 것과 달리 말년에도 여전히 좌익 중심의 이념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애니계의 좌파 중에서도 핵좌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공투]]에 대해서는 그런 짓 [* 파벌 싸움, 살인, 테러 등]을 저질렀으니 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세상이 바뀌었으면 했다는 아쉬움은 계속해서 드러내는 중이다. 대신 그런 걸 보여주는 건 개인적인 인터뷰나 타작품 비평을 할 때이고[* 예로 그 [[미야자키 하야오]]조차도 당신은 좌익이 아니야!라고 자주 비평하였다.] 인랑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렇게 자신의 이념을 작품에 크게 넣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그 인랑 자체는 전공투를 미화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진성 좌파라는걸 인정한 작품이다.] 오히려 무력함에 대한 절망이 작품의 테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리고 물질 사회 비판이 많다. 특히 고층 건물과 신도시를 매우 싫어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원시 공동체 사회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주장은 안 하지만 인간이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 지론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시이의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에 대해 "뭔가 있어 보이지만 도쿄가 지나치게 발전한 게 싫고 부숴버리고 싶다는 내용일 뿐이다." 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밀덕]]이기도 해서 그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고증을 잘하는 편이다. 문제는 [[독일군]]의 팬이기도 해서 초기작에서는 [[나치]] 찬양으로 오해받을 정도의 묘사까지 종종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로 서양에서 유명해진 뒤로는 자중하고 있다. 그리고 오시이 작품에서 독일 군복은 바보 캐릭터가 입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독일군 병기도 개그 신에서 주로 나왔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나치를 조롱하는 것으로 보고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오시이 작품이 해외에 수입되어도 이러한 장면은 대부분 검열을 당하지 않았다. 밀덕이라고 해서 전쟁을 좋아하거나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해외의 자료까지 철저하게 팠기 때문에 역사 인식이 상당히 올바르다. 즉 전쟁은 싫어하는데 병기는 멋있다는 타입의 밀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